이 글은 여러 책과 참고 도서를 읽어가며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정리한 글이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 어떤 배경에서 일어났으며, 전개 과정과 한계, 그리고 그 이후는 어떤지에 대해서 잘 알 수 있게 정리해 놓았다. 긴 글이긴 하나, 2번 정도 정독한다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에 대해선 아주 상세히 알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중국 현대사에서 권력 장악 시도와 견제가 가장 흥미진진하고, 손에 땀을 쥘 만큼 긴장감 있게 쉴새 없이 벌어졌던 시기이다. 대약진과 문혁에 대해서 공부하려는 분들께 이 글이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에 블로그에 올린다.
Ⅰ. 서론
1.
흐루쇼프의 집권
1953년 3월 5일 소비에트 연방의 제 2대 서기장인 스탈린이 사망한 후, 게오르기 말렌코프 서기장의 7일간의 짧은 임기에 이어 니키타 흐루쇼프가 4대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스탈린주의를 비판하였고 대외적으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와의 공존을 모색한 인물이었다. 그의 반 스탈린 정책은 중국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에 폭넓은 충격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56년 2월 24일 밤,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개최되던 소련 공산당 제 20회 당 대회가 정규
일정을 끝내고 폐막된 직후, 당 제 1서기인 흐루쇼프가 7시간에 걸쳐서 ‘개인 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보고를 했다. 소련의 절대 지배자로 군림하며 오점이 없는
인물로 신격화된 스탈린에 대한 규탄이었다.
이 대회에는 중국 공산당도 당 부주석인 주덕을 단장으로 하여 당 비서장 등소평, 부비서 장담진림 등이 수행하는 대표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보고는 외국 대표단을 제외한 비밀 회의에서 발표되었기 때문에 모택동은 이를 3월 10일 <뉴욕타임즈>의
특종의 번역본으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모택동은 후에 이에 대한 긴급 회의를 열고 “뚜껑은 열렸지만 문제도 불러일으켰다”라고 총평했다. 소련 공산당과 스탈린조차 반드시 옳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하여 미신을 타파했지만, 내용이나 방법에서 큰 실수를 범했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그는 “스탈린은 실수도 저질렀지만 위대한 공적도 있다. 흐루쇼프의 비밀 보고가
초래한 손실은 될 수 있는 한 보충해야 한다”며흐루쇼프의 비밀 보고를 비판했다. 스탈린에 대한 비판은 중국 공산당과 독재적 지도자인 모택동의 신뢰성을 뿌리채 뒤흔들 만한 위험성이 컸기 때문이다. ‘비밀 보고가 초래한 손실’이란 바로 이를 가리킨다. 실제로 비밀 보고가 밝혀진 이후, 폴란드와 헝가리 당 내외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와 동란으로 발전하였고, 헝가리에서는 소련군이 전 영토를 제압하는 유혈 대참사가
일어났다. 모택동의 걱정은 적중했고, 이후 모택동은 흐루쇼프에게
심한 분노를 느끼며 그를 ‘공산당의 배반자’로 간주했다.
Ⅱ. 본론 1 – 대약진
운동
1. 대약진 운동의 배경
i.
정부 수립 후 용지
활용 문제
1949년 10월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난 이후, 중국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이후 지주층들과 부유한 농민들은 그들의 농지를 가난한 농민들에게 강제로 재분배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재분배 용지의 활용 방안 문제가 대두되었다. 유소기와
같은 현실주의파는 점진적 변화를 추구해야 하며, 집단농장화는 우선 산업화가 이루어져 기계화 농업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모택동과 같은 급진파는 산업화에 이르는 가장 빠른 방법은
정부가 농업의 생산과 분배를 독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곡물을 낮은 가격에 수매하여 높은
가격에 팔아 남은 이윤으로 국가의 산업화에 필요한 자본을 충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모택동의 생각은 대약진 운동에서 ‘인민공사’로 실현되었다.
ii.
흐루쇼프에 대한 모택동의
적대감
이러한 흐루쇼프에 대한
적대감은 무리한 ‘대약진 운동’의 입안으로 이어졌다. 1957년 11월 6일, 10월 혁명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공산권 국가들의 당 지도자들이 모스크바에 모였다. 이 날, 소련의 서기장 흐루쇼프는 소련이 공업 생산과 농업 생산으로 15년
이내 미국을 ‘평화적으로’추월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모택동은 이를 보고 경쟁 심리를 느껴, 1958년 <제 2차 5개년
계획>을 세우고 당시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인 영국을 15년 이내에 추월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중국이 자체의 목표를
세우고 실천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이는 현실을 망각한 무모한 계획이었다.
iii.
백화운동과 반우파운동
1957년 4월 27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모택동 주석의 ‘정풍운동에 관한 지시’를 발표했다. 인민 내부의 모순을 처리한다는 취지로 관료주의, 종파주의 등을 극복하기 위한 정풍운동을 벌일 것이라는 결정이었다. 이는 1년 전 모택동이 지시한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운동의
강력한 재추진이었다. 백화제방 백가쟁명이란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고, 서로 다른 많은 학파가 논쟁을 벌인다’라는
뜻으로, 인민들에게 자유로운 토론과 논쟁을 장려하는 방침이었다. 이에
따라 당원뿐만 아니라 당 외 지식인들의 공산당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비판이 허용되었다. 처음에는 지식인들이
말하길 꺼려했으나, 공산당은 ‘말하는 자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言者無罪)’라고
천명하며 적극적인 발언을 호소했다. 그러나 예상 외로 공산당의 일당독재와 모택동 권력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오자 이는 반우파투쟁으로 변모했다. 1957년 6월
인민일보에 우파의 책동을 비난하는 사설이 실리며 지식인들은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농촌으로 추방되었다.
2. 대약진 운동의 전개와 결과
i.
끔찍한 참상
대중 동원에 의한 ‘대약진’과 대규모 집단화인 ‘인민공사’를
통해 철강이나 곡물 생산을 단숨에 확대시키려는 모택동의 대호령은 생산 현장에 대혼란을 야기했다. 공산주의의
이상 실현을 서두르는 모택동의 의도와는 정 반대로, 생산은 조금도 신장되지 않고 오히려 식량난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모택동의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는 말로 중국의 참새가 멸종하여 해충이 창궐한 예도 있었다. ‘제사해
운동’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장려된 정책이었다. ‘제사해’란 “4가지 해충을 제거한다”라는
뜻으로, 모택동은 들쥐, 파리, 모기 그리고 참새를 멸종시키자고 역설했다. 참새가 곡식 낟알을 먹어
인민의 노동의 결실을 빼앗는다는 이유였다. 전국의 참새들의 둥지와 알은 부숴졌고, 어린 새들은 살해당했다. 학교, 작업반, 정부 기관마다 죽인 새의 부피에 따라 비물질적인 상과 표창이 주어졌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참새가 해충도 잡아먹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1960년
4월이었다. 결론적으로 제사해 운동은 베뚜기의 개채수의 폭등을 초래해 생태계를 초토화시켰다. 이는 3년 연속 대기근을 초래한 한 원인이 되었다.
중국은 1959년부터 3년 연속 대흉작이 계속되고 있었다. 무계획적이고 강제적인 증산 정책이
가뭄이나 수해의 피해를 확대시켰다. 대약진의 성과를 과시하려고 곡물 생산량을 실제의 배 이상으로 부풀렸기
때문에 과대한 공출을 할당받게 되었고, 농민에게는 곡물 징발을 엄격하게 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는 말단 간부에겐 ‘우경’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공출을 내지 못하는 농민은 결박해서 매달
아 두거나 집을 부수어 버리기도 했다. 이러한 참극의 정점이 바로 남부의 신양전구에서 발생한 참극이다.
신양전구에서는 1958년 4월에 전국 최초로 위성(衛星)공사가 조직되어, 신양전구 당 위원회
서기인 노헌문은 모택동에게 최고의 칭찬을 받았다. 그래서 아무도 노헌문을 거역하지 못했다. 1959년 11월에서 1960년 7월까지, 신양전구 전체에서 ‘생산량
속이기 반대’ 운동으로 인해 체포된 농민들은 공식 자료만으로
1,773명이고 그 중 36명은 옥사했다. 구류당했던
사람은 17020명이며, 667명이 유치장에서 사망했다. 농민들이 씨앗이나 동물들 사료로 이용할 곡물도 모두 징수해가서, 1960년
봄에는 누구나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고 선전한 ‘공공 식당’조차
운영하지 못하게 되었다. 영양 실조로 온몸이 퉁퉁 부어오르는 부종병이 만연하자 농민들은 도망치기도 했지만, 노헌문은“곡식이 없는 것이 아니다.
9할은 사상에 문제가 있다”라고 말하며 마을을 봉쇄했다.
인민들의 인민 공사에 대한 불만감은 더 심화되어 갔다.
‘대약진 운동’으로 전체 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9천만 명은 철강 생산에 동원되었다. 재래 기술을 이용한 조그만한 용광로인 ‘토법고로(土法高爐)’가 전국의 학교와 군부대, 당 기관까지 수백만 기나 만들어졌다. 이에는 가정의 쇠냄비까지 원료로
동원되었다. 또 곡물 증산에서도 경작지에 빽빽이 씨앗이나 모종을 심는 ‘합리밀식’의 성과가 선전되어 한 때는 곡물이 너무 많아질 것이라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철강과 곡물은 대부분 쓸모없는 고철과 알맹이가 없는 곡물이 되어버렸다. 열광적인 대중 동원으로 일손을
빼앗기는 일도 많아, 1960년 곡물 생산량은 대약진 이전인 1957년에
비해서 26%나 감소했다. 결과적으로 물가는 폭등했고, 굶주림이나 영양 실조로 죽은 사람은 2천 7백만 명에 이르렀다.
ii.
여산 회의와 팽덕회의 실각
1959년 6월 13일 소련과
동유럽 8개국 순방을 마치고 북경에 돌아온 팽덕회는 ‘모택동은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국가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더해 대약진 운동의 참상을 보고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노선 전환을 한층 더 강하게 요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산
회의는 1959년 7월 2일에
개막되었다. 대약진과 인민공사화의 정책 수정이 의제로 올라갔지만, 모택동은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성과가 컸다. 문제도 많지만 앞길은
밝다”고 선수를 치듯이 결론을 내렸다. 팽덕회는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당을 집단지도체제로 한다는 결정에 반대하고,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있소. 조직의 위신을 높이지 않고 개인의 위신을 높이는 것은 위험합니다.”“모택동 주석과 당 중앙의 위신을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작년에
무턱대고 하달된 모 주석의 의견에는 문제가 적지 않았소.” 모택동은 이를 전해 듣고 팽덕회에 대한 의심이
커져 갔지만, 팽덕회는 이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7번이나
정책 비판을 했다.
팽덕회는 이에
멈추지 않았다. 모택동 앞으로 3천 5백여 자의 편지를 쓴 것이다. 그는 “대약진의 성과는 의심할 여지없이 위대하다”고 하면서, 토대 없이 지나치게 빠른 경제 건설이 불러일으킨 혼란과 실태를 숨긴 물타기 보고의 허구 등을 열거하고, 경제 법칙보다 정치를 우선하는 ‘프티-부르주아적 열광성’이 ‘좌익
편향’의 과오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공산당 내에서 ‘프티-부르주아적 열광’이
‘사이비 노동자 계급의 급진주의’를 뜻하는 만큼, 모택동의 분노는 컸다. 이 편지는 모택동에 의해 여산에서 개최되고
있는 당 정치국 확대 회의에서 일방적으로 배포되고 공격 대상으로 삼아졌다.
결국
모택동은 여산 회의에서 팽덕회와 그를 지지하는 장문천, 황극성, 주소주
등을 비판하는 것은 노선 투쟁이라고 선언한다. 그 여파로 중국 공산당은 이들의 직무 해임을 결의했다. 팽덕회의 실각 후 그의 자리에 대신 오른 것은, 여산 회의 때 모택동을
옹호하고 팽덕회를 비판하던 젊은 군 원수 임표였다.
Ⅲ. 본론 2 – 문화 대혁명
1. 문화대혁명의 배경
i.
모택동과 유소기의 노선 갈등
1958년부터 시작한 ‘대약진 운동’’은
현실과 유리된 급진 정책이었기 때문에 경제를 파탄시켰다. 1959년 모택동은 대약진운동 실패의 책임을
지고 국가주석에서 사임했다. 이어 유소기가 국가 주석, 등소평이
당총서기를 맡게 되었다. 유소기와 등소평 등 실무파는 극단적인 집단화 정책을 완화하고 농민들에게 생산의
자유를 일부 인정(호별 생산 청부제)하는 경제 조정을 진행했다. 유소기는“생산보다 구매가 더 좋고,
구매보다는 대여가 더 좋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모택동의 자급자족 경제관과 모순되는
경제 정책을 실시하려 했다. 그리하여 인민공사와 같은 집단화를 해체하고, 대약진 이전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서 1962년경부터는 경제가 회복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이러한 유소기의 정책에 불만이 많았다. 개인의 자율 생산이 확대되면 반드시 자본주의 부활의
싹을 키우게 되고, 집단 경제를 기초로 하는 사회주의가 이완되어 소련과 같은 수정주의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계속 혁명론”을 호소하며 1957년 모든 농촌 사람들에게 대규모 사회주의 교육을
하도록 제창했고, 1960년에는 농촌에서 “삼반(三反- 반비리, 반낭비, 반관료주의) 운동을 전개하게 했다.
이러한
마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 진행된 지방은 극소수였다. 그는 ‘당면한 농촌 공작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결정’을 기초하게 했다. 이게 후에 ‘전10조’로 불리는 것이다. 모택동은
‘요점은 계급 투쟁이어야 할 것, 빈농과 중농을 기반으로
삼을 것, 사청 운동을 펼 것’으로 지시했다. 결과적으로 사회주의 교육 운동은 강제로 진행되어 말단 간부 7~8할이
‘계급의 적’으로 적발되고 자살자가 500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정세가 더욱 심각하다는 ‘허상’에 의거한 보고는 모택동의 위기감을 더욱 높였다. 그는 “우리국가 3분의 1의 권력은 적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다”라는 인식 하에,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을 준비해 갔다.
마오의 이러한 인식과는 달리, 유소기를 중심으로 한 실무파는 계급
투쟁이 아닌, 계몽 운동이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북경
시장 팽진은 원래의 하부 조직과 간부에 의지하여 운동을 추진하자고 강조했으며, 유소기도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여 ‘후10조’를
채택하게 된다. ‘후10조’는
‘전10조’와
달리 하부 조직과 간부를 기반으로 ‘공작대’가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것을 강조했다.
이런 행동을 모택동은
‘수정주의’라고 보았으며,
1965년 1월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를
타도하라’라고 호소도 했지만 관료화된 조직은 움직이지 않았다. 모택동은
지속적으로 ‘중앙에 수정주의가 발생한다면 바로 반항 타도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사회주의 교육운동을 ‘계급투쟁’으로 바꾸는 강령(23조)를
공포했다. 이는 사청운동과 함께 유소기를 직접적으로 겨눈 운동이었다.
ii.
해서파관
1959년 말, 역사가이자 베이징 부시장인 우한이 역사 희곡 <해서파관>을 발표하였다.
이는 명나라 때의 실존 청백리인 해서가 직언을 해서 가정제에게 파면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1956년 11월 10일,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라는 제목의 논문이 신문에 실렸다. 후에 ‘4인방’ 중 한 명이 되는 요문원은 이 논문에서 “봉건 시대의 관리를 긍정적으로 그린 것은 지주 계급 국가를 미화하고 혁명을 불필요한 것이라 주장하는 계급 조화론을
선전한 것”이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독초’라고 비판했다.
북경 시장 팽진은
생각지도 못한 트집을 잡은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팽진은<현재
학술적 문제에 대한 대강>을 발표하여 해서파관에 대한 논란을 정치 문제가 아닌, 순수한 학술문제로 한정하려 하였다.
‘해서’를 찬양하는 말은 꺼낸 것은 사실 모택동이었다. 모택동은 6년 전인 1959년 4월, 상해에서 호남성의 경극을 보고 아첨하지 않고 간언하는 ‘해서 정신’을 칭찬했다. 그러나
그 해 여산 회의에서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간언을 하다 실각되었고, 모택동은 ‘해서’가 팽덕회와 비교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원래 오함의 논문에는 “해서와 팽덕회는 같지 않다”는 의미를 담아 “해서는 우파가 아니다”라는 한 구절이 덧붙여졌다.
그러나 갑자기 <해서파관>을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등장한 것은 모택동의
아내, 강청이었다. 요문원의 논문을 집힐하는 데에는 강청이나
상해지 당 위원회 서기인 장춘교가 전면적으로 관여했다. 강청은 문예계가 “일부 반당, 반공산주의의 불순세력의 음모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모택동에게 보고했다. 확실한 것은, <해서파관>을 쓴 연구가 오함이 부시장을 맡은 북경시당
위원회의 제1서기인 팽진은 실권파 유소기와 가까운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팽진은 표적이 되었다.
팽진은 이러한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방치해 두었던 ‘문화 혁명 5인소조’를 소집하고 ‘2월 태제’를
발표하였다. 그는 “실사구시를 견지하고, 독단과 권세로 남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며 학술 논쟁의 틀 속에
묶어두려 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이를 비판했고, 북경시 당
위원회와 ‘5인 소조’도 해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1966년 5월 4일
북경에서 열린 당 정치국 확대 회의에서 팽진은 북경 시장을 포함한 일체의 공직에서 해임당했다. 그리고 5월 16일, 중국공산당
정치국은 문화대혁명의 시작을 상징하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 혹은 <5.16 통지>를
발표하였다. 이 통지에서 팽진, 육정일, 나서경, 양상곤이 직책에서 해임당했고, 5인 소조도 해체되었다. 대신 5인
소조를 대체할 ‘중앙 문혁 소조’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후에 4인방이 문혁 기간 동안 권력을 유지해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2. 문화대혁명의 전개
i. 섭원재의 대자보와 홍위병의 등장
1966년 5월 25일, 북경대학의 학생 식당에 북경시 당 위원회와 북경대학 당 위원회의 간부가 모두 군(君)이라고 깎아 내려진 호칭으로 불리며, 통렬하게
비판받은 대자보가 실렸다. 이는 문화 대혁명기에 있어서 대자보가 처음으로 출현한 계기였다. 대자보는 후에 중국 대륙의 방방곡곡을 뒤덮고, 사람들을 대중적으로
규탄하는 수법으로 남발되어 갔다.
그러나 이 시기
중국에서 당 간부에 대한 비판은 당에 대한 ‘반당 행위’였으며, 자살 행위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대자보의 필자는 총 7명이었는데, 그 필두는 북경 대학의 여성 강사인 섭원재(聶元梓)였다. 대자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집회나 대자보는 대중적이고 전투적인 최선의 방법인데도, 군들은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지도’함으로써 대중적 혁명을 탄압하고
있다……모택동 사상의 위대한 붉은 깃발을 높이 치켜 들고, 모든
요상스런 변화와 흐루시초프(Nikita Khruschchov) 류의 반혁명 수정주의 분자를 일소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최후까지 수행하자.” 즉, 육평의 북경 대학 당 위원회와 이를 지도하는 북경시 당 위원회는 모택동이 새로이 일으킨 “무산 계급 문화 대혁명”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자보의 저자
섭원재는 ‘중앙 문혁 소조’의 고문인 조일구로부터 대자보를
쓰면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았다. 섭원재는 당시 사회주의 교육 운동 본연의 모습을 둘러싸고 학장인 육평과
대립하고, 육평을 지지하는 시 당 위원회에 대해서도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대자보를 내다 붙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국무원 총리인
주은래가 이 소동을 알게 되었고, 그는 섭원재의 행동이 당의 규정에 위배된다고 엄하게 비판했다. 섭원재는 집회에 끌려나와 ‘당의 배신자’라는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6월 1일 9시, 중앙 인민
방송국에서 육평을 매도한 대자보가 “전국 최초의 마르크스 레닌주의 대자보”라고 칭찬받았다. 다음날 당 기관지
<인민일보>에도 섭원재 등의 대자보에 “환호를
보낸다”라는 논평까지 곁들여 대대적으로 지면을 장식했다. 당
중앙이 북경 대학 당 위원회와 북경시 당 위원회를 공격한 것이다. 이는 모택동의 지시였다.
모택동은 이 무렵의 북경을 “물
한 방울도 튕겨 내고, 바늘도 통과시키지 않는 수정주의의 독립 왕국”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모택동은 그가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해 초조함이 점차 심화되고 있던 때, 섭원재의 대자보라는 절호의 돌파구를 만났던 것이다. 그는 대자보를
읽고 “북경대학이라는 반동적 보루를 타파할 수 있겠군”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섭원재의 대자보가 붙은 얼마 뒤인 1966년 6월 초, 북경의
청화대학 부속 중학교 교내에 “우리들은 붉은 정권을 방위하는 위병이다”라는
대자보가 붙었다. ‘홍위병(紅衛兵)’의 등장이었다. 홍위병들은 문화 대혁명에 참가하고자 한 부속 중학생들의
자주 조직이었다. 초기 홍위병 구성원들은 대부분 학업 성적도 우수한 당 간부의 자제들이었기에, 그들은 ‘혁명 사업의 후계자’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모택동 신격화가 강화되는 가운데 이는 ‘모택동
사상의 절대 권위를 확립하려는’ 열광으로 쉽게 바뀌었다. 모택동은
영속 혁명을 주장하며 지식인을 신뢰하지 않았고, 인민들에게 혁명 사상을 주입하려 했다. 그 겨냥은 적중했다.
이후 <인민일보>는 “부르주아 계급의 학자나 권위를 일소하자”는 등, 문화대혁명을 고무하는 사설을 5일 연속으로 실었다. 학교에는 대자보가 넘쳐나고, 모든 것이 ‘권위주의적’이며
‘수정주의적’이라는 이유로 학생들에게 규탄당했다. 당연하게도 북경 대학 당 위원회 서기이자 학장인 육평과 부서기인 팽패운은 대학에서 쫓겨났다. 또 학교 간부나 교사, 학생이 규탄 집회에 폭력적으로 끌려 나가
사망하거나 자살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일은 봉건사회에서도 없었다”, “이것이 당의 정책이 아니기를 빈다”는 내용의 편지가 희생자의
가족들로부터 연일 날아들었다.
ii.
유소기의
공작조 파견과 조반유리
유소기는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당의 간부들로 이루어진 ‘공작조’를 파견하여
진정시키려 했다. 당 정치국 상무위 확대 회의에서 ‘공작조’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대자보는 학교 내에 붙일 것”, “가두시위 행진은 금지”, “대규모의 규탄 집회는 금지” 등의 ‘8개조 지시’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공작조의 진입에 학생들은 ‘혁명의
억압’이라고 반발하며 각지에서 충돌을 일으켰다.
1966년 6월 18일, 북경 대학 학장직과 대학 당 위원회 서기직을 해임당한 육평을 비롯한 당 간부,
교사, 학생이 북경대 캠퍼스 안에서 급진적인 학생들에게 ‘흑방(黑幇, 검은 일당)’으로 공개적으로 규탄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어떤 사람들에겐 강제로 검정칠을 하고, 종이를
말아서 만든 삼각 모자를 씌우거나, 목에 이름이나 죄명을 크게 쓴 팻말을 매달기도 했다.
이 소동을 알게
된 공작조는 현장의 소동을 중단시키고, 전교 대회를 열어 “맹목적인
규탄 행위는 혁명 운동을 훼손시킨다”고 비난했다. 유소기는
이 사건의 보고서에 “처리는 정확하고 재빨랐다. 이후 참고로
삼도록” 이라는 의견을 붙여서 당 중앙의 이름으로 전국에 배포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을
‘질서 있게’ 지도하는 공작조와, 자신들이야말로 모택동의 문화 대혁명을 성실하게 실행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홍위병 등이, 서로가 상대방을 ‘반 혁명’이라고
비난하는 현상이 생겨나고 있었다. 충돌은 격렬해져 갔다. 유소기는
차츰 강경하게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작조를 파견한 지 20여
일 동안에, 북경의 24개 대학에서 1만 명 이상의 학생과 수천 명의 교원이 공작조로부터 ‘반혁명 분자’라는 낙인이 찍혀, 자살하는 학생까지 나왔다.
청화 대학의 공정화학부 3학년 902조의 학생인 괴대부(蒯大富)는 반공작조의 한 사람이었다. 6월
21일, 유소기의 아내이자 비서인 왕광미(王光美)가 공작조의 일원으로 청화 대학에 파견되었다. 괴대부를 포함한 많은
학생들은 당 중추에 대한 중개역을 기대하고 자신의 의견을 들어주길 희망했다. 그러나 왕광미는 괴대부가
권력 탈취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당일에 참석을 취소해 버렸다. 902조 학생들은 분개하였고, 괴대부는 대자보로 공작조를 규탄하였다. 그러나 공작조는 시위대를 조직하여 “반혁명 분자 괴대부의 광기 어린
진공을 격퇴하라”고 맹렬히 규탄했다.
이 시기 괴대부가
공작조의 공격을 받고 열세에 놓여있던 6월 24일, 부속 중학교에 “혁명은 곧 조반(造反, 항거, 반항). 모택동
사상의 혼은 조반이다”라는 홍위병의 대자보가 등장했다. ‘조반’이라는 말은, 당시 <인민일보>가 게재하던 모택동 어록의 “마르크스주의의 도리는 복잡하기 짝이
없지만, 결국은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조반유리(造反有理, 항거에는 이치가 있다)이다”라는 구절에서 나온 것이었다.
본래 홍위병의
운동 진압에 소극적이었던 모택동은, 7월 18일 8개월만에 북경에 나타나 유소기를 불러 공작조의 파견을 엄하게 비판했다. “학생
운동을 진압하는 것은 누구인가? 원세개의 북양 군벌과 장개석의 국민당뿐이 아닌가.” 즉, 공작조를 파견한 것은 ‘반혁명’과 똑같은 행위라는 것이었다. 모택동은 또 24일 중앙 문혁 소조를 소집하고 “공작조는 운동을 저해하고, 나쁜 영향을 미친다. 모두 추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이는 유소기에게 문혁 기간 동안 계속될
시련의 시작일 뿐이었다.
iii.
사령부를
포격하라
모택동은 항주에
있다가 돌아와, 1966년 8월 1일부터 북경 인민 대회당에서 당 제8기 중앙 위원회 제11회 총회를 개최했다. 참석자들은 총회중인 7일, 배포된 자료를 보고 깜짝 놀랐다. 표지에는 “사령부를 포격하라-나의
대자보(炮打司令部—我的一张大字报)”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모택동의 ‘지령문’은 다음과 같았다. “일부
지도자 동지는 반동적 부르주아지의 입장에서 문화 대혁명 운동을 깔아뭉개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사기를 꺾고
의기양양해 있다. 이 얼마나 악랄한 짓인가.” 모택동이 당
부주석 겸 국가 주석인 유소기의 ‘사령부’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공공연한 유소기 타도 선언이었다. 모택동은 유소기의
질서 정연한 문혁 추진 도모를 무시하고, “90퍼센트 이상의 공작조는 완전히 잘못했다. 대중을 진압하고, 운동을 방해하고,
나쁜 영향을 주었다”고 질책했다. 중앙위원들과
유소기의 자아비판이 이어져도 모택동은 “너는 북경에서 독재를 편 것이다. 감히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나?”라고 비난했다.
8일에는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에 관한 결정”이 채택되었다. 약칭 ‘16조’로 불리는 이 결정은 문화 대혁명을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새로운
단계로 칭송하며, “당 내의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실권파의 타도”가
운동의 주요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12일에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모택동이 당 중앙 기구의 개조를 제안안 후, 정치국원과 정치국 상무위원의
순위를 모택동이 일방적으로 결정하였다. 유소기는 국가 주석이긴 했지만,
당내 서열은 2위에서 8위로 전락했다. 한편 6위였던 정치국 상무위원인 임표가 2위로 뛰어올랐다. 상무위원들은 7명에서 11명으로 늘어났는데, 늘어난 4명 중 3명이 진백달(陳伯撻) 등 문혁 급진파인 ‘중앙 문혁 소조’ 일원들이었다.
1966년 8월 18일 천안문 광장에서 모택동이 ‘문화 대혁명 백만인 축하 대회’를 개최한 후 2개월이 지난 1966년 10월부터
유소기와 등소평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부르주아 반동 노선’의 두목이 유소기와 등소평이라고 처음으로 이름을 밝혀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는 1966년 10월 16일 중앙 공작 회의에서 문혁 급진파의 ‘중앙 문혁 소조’ 조장인 진백달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다. 이 비판은 길거리의 대자보를
통해 계획적으로 외부로 새어나가, 중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1966년 12월 18일, 청화대학의
홍위병 조직인 ‘정강산 병단’을 이끄는 20세 학생, 괴대부가 ‘중앙
문혁 소조’의 장춘교와 직접 만났다. “혁명 소장(홍위병)은 연합해서 혁명 정신을 발휘하여, 물에 빠진 개를 때려 잡아야 하네.”라는 장춘교의 말을 들은 후, 괴대부는 청화대로 돌아와 긴급 간부 회의를 열고 장춘교의 지시를 실행에 옮기도록 했다. 25일 오전, 5천 명의 홍위병의 선두에 선 괴대부는“몸이 여덟 갈래로 찢어지더라도 황제를 말에서 끌어내리자”하고 외치며
“타도 유소기”의 슬로건을 외쳤다. 이후에 홍위병을 포함한 문혁 급진파는 유소기의 집에 침입하여 유소기의 아내 왕광미에게<모택동 어록>을 복창시켰다. 심지어 강청은 유소기의 딸인 유평평이 ‘교통 사고를 당했다’는 거짓 보고로 왕광미를 꾀어낸 뒤, 칭화 대학의 비판 집회에 연행하게
했다. 유소기에 대한 폭력은 계속되었다. 조반파(문혁 급진파)들은 유소기의 타도를 외치며 유소기의 자택에 무단 침입했으며, 자아 비판을 강요하고 욕설을 해댔다. 비서 유진덕은 중앙 경호국에
전화하여 구원을 요청했으나, “문을 열고 그들을 들여보내십시오. 더
이상 제지할 수 없습니다.”라는 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1967년 3월, ‘중앙 문혁 소조’의
조사 보고서에는 ‘유소기의 배신 행위’가 명기되고, 모택동도 이를 승인했다. 21일에는 모택동의 동의로 ‘유소기 특별 심사조’가 당 내에 설치되었으며, 30일에는 당 기관지 <홍기>에
유소기의 글을 비판하는 평론이 개제되었다. 이렇듯 모택동이 공공연하게 유소기를‘배반자’를 공인한 이후, 대중적인
공격은 한 층 더 맹렬해졌다. 홍위병들은 24시간 체제로
중남해(당 기관, 요인의 집이 있는 광대한 지역)를 둘러싸고 ‘유소기 끌어내기’ 운동을
했다. 7월 18일, 조반파가
유소기의 자택에 난입하여 유소기와 왕광미, 그리고 자녀를 각기 다른 방에 연행했다. 2시간에 걸친 비판 대회 동안 유소기는 구타당했으며, 발언은 일체
금지되었다. 유소기는 고문이 끝난 후, 집무실에 감금되었다. 그 날 등소평도 중남해의 저택에서 ‘비판 대회’ 규탄을 받았다.
‘사령부를 포격하라’라는 모택동의 대자보가 배포된지 1년이 되는 1967년 8월 5일, 유소기는 집무실에서 끌려나와 궐기 집회에서 조반파에게 심하게 구타당했고,
<모택동 어록>으로 온몸을 마구 찔렸다. 유소기는 7일 모택동에게 편지를 쓰고, 국가 주석의 사임을 다시 청했으나,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취사 담당도 조수도 유소기 곁을 떠나갔고, 그는 체력이 심각하게 쇠약해져 갔다. 하지만 누구 하나 부축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 의사도 때로 청진기로 때렸고, 주사기로 몸을
마구 찔러대는 간호사도 있었다. 조반파에게 당하게 될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감금생활에 들어간 지 1년 3개월이
지난 1968년 10월, 북경에서
열린 당 제8기 중아 위원회 확대 제12회 총회에서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 유소기는 당 내에 숨어든 배반자, 적의
하수인, 노동귀족”이라는 심사 보고서가 채택되어, “당으로부터 영구 제명과 당 내외의 일체 직무 해임”이 결의되었다. 유소기는 1년 후, 하남성
개봉으로 옮겨져 콘크리트 창고 방에 감금된 후, 11월 12일
사망했다. 그가 명예 회복이 되고 유언대로 유골이 바다에 뿌려진 것은 모택동이 죽고 4인방이 몰락하고 주은래가 집권한, 1980년이 되어서였다.
iv. 군 원로와 강청의 갈등
유소기와 등소평에
대한 비판에 이어 국가 기관과 당 조직도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의 소굴’로 혁명화의 대상이 되었다. 홍위병의 운동은 기성 당 기관으로부터
실권을 빼앗는 ‘탈권 투쟁’의 양상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상해에서는 조반파와 노동자 조직이 상해시 당 위원회에 격렬한 공격을 가했다.
백만인 집회를 열어 “반혁명의 죄행을 고백하라”며
조적추 등 시 당 위원회 최고 간부를 박해하여 정치 생명을 끊었고, 사해의 권력을 장춘교 등 문혁 급진파가
장악했던 것이다. 이러한 바람은 인민 해방군에도 닥쳐왔다.
임표는 군 내부에서
‘혁명적인 모택동 사상으로 사회 구석구석까지 물들게 한다’는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의 기조가 생각되로 진행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원인을 공산당 중앙
군사 위원회의 부주석인 섭검영 등의 군 원로가 저항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조반파의 군 기관
습격을 군 원로와 간부를 타도하기 위한 비판 공세로 이용해 갔다.
모택동의 아내인
강청이 주도하는 ‘중앙 문혁 소조’에 부조장으로 참가하던
인민 해방군의 유지견(劉志堅)은 1966년 6월 전군 문화 혁명 소조가 생기자 그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나 강청은 유지견이 군 원로와 결탁해 문혁의 군내 침투를 방해하고 있다고 보았다. 1월 4일, 강청은 군사
학교의 조반파 앞에서 “군부 내에서 부르주아 반동 노선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 유지견의 ‘전국 문혁 소조’다”라고 비판하고, ‘전국
문혁 소조’의 개조를 역설했다. 임표도 이 공격에 가세했다. 결국, 1월 11일, ‘전국 문혁 소조’는 개조되고, 중앙
군사위 부주석인 서향전(徐向前)이 후임 조장이 되었다. 그는 주덕, 섭검영 등과 군의 최고 원로이고 ‘10원수’ 중 한 사람이었다. 이는
임표와 강청이 군 원로를 끌어내기 위한 책략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 이후, ‘경서빈관’에서 열린 중앙 군사위 확대 회의 석상에서 군 원로와
조반파는 충돌했다. 군 원로와 강청은 서로를 비판하며 그 수위를 높여나갔다. 2월 14일 오후, 북경
중남해의 회인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군 원로는 ‘문혁 소조’의 독선을 비판했고, 과도한 ‘탈권’ 욕심, 즉 권력을 탈취하려 하는 것을 공격했다. 강청 등 조반파는 이에 맞서 모택동에게 상당 부분 각색한 의사록으로 마오가 ‘군
원로들이 모택동의 실각을 노리고 있다’라는 거짓 신념을 믿게 했다. 결과적으로
군 원로들은 문혁의 흐름을 역류시키려고 했다는 반혁명 행동의 표적이 되어, 훗날 ‘2월 역류’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은 전국에서 전개되는 엄한 비판에 노출되며, 차례차례로 직권을
박탈당하고 실각했다. 결과적으로, 강청의 ‘문혁 소조’는 당 정치국을 대행하는 최고 정책 결정 기관이 되고, 임표는 군부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v.
모택동의
변심
문화대혁명이 끝날
무렵인 1967년 7월, 전국은
각지에서 문혁 지지를 외치는 조반파들에 의한 무장 투쟁과 무력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모택동은 몇 가지
구체적인 조치를 취했다. 인민 해방군의 무기나 군용 물자의 약탈을 금지하는 명령을 하거나, 너무나 혼란스러운 지방에 군사 통제를 펴는 결정을 한 것이다. 이
즈음 모택동은 문혁을 끝낼 생각을 하고 있었고, 급진파의 비판을 받고 실각한 고참 당원들도 부활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혁명성’이나 ‘급진성’을 서로 겨루는 일이 무력이나 폭력이 난무하는 무정부 상태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인민
해방군 총참모장 대리인 양성무에게 논문의 초고가 사전 심사를 받기 위해 보내져 왔다. 제목은 “모 주석의 절대적 권위를 크게, 특별히 확립하자”였다. 양성무는 이를 모택동에게 재가를 요청했으나, 모택동은 자신을 모두 칭찬하는 내용으로만 가득 차 있다며 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를 본 양성무는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을 거절하나, 임표와
섭군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양성무의 이름으로 발표하게 한다. 결국 논문은 1967년 11월 3일자 <인민일보>에 발표되었고,
모택동은 격노했다. “제목부터가 반마르크스주의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리석어진다”라고 비판한 것이다.
처음에 개인 숭배를 긍정하는 모택동이 부정적으로 돌아선
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국가 주석인 유소기와 당 총서기인 등소평 타도에 성공해서 이전만큼
개인 숭배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유소기와 등소평이 실각되었기 때문에 이용해 왔던 임표를
누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1968년이 되어도 조반파의 무장 투쟁은 없어지지 않았다. 혁명 조직은
인민 해방군 부대나 기관을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고, 철도 수송을 파괴했다. 최초의 홍위병이 등장한 북경의 청화대학에서는 괴대부의 ‘정강상 병단’과 홍위병 조직인 ‘4.14파’사이의
세력 다툼으로 소총과 장거리포, 소이탄, 장갑차에 의한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이러한 대혼란 상황을 모택동은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1968년 9월 당 중앙을 통해 2개의 포고를 내려 당장 무장 투쟁을 중지하도록
지시했으며, 3만 명의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모택동 사상 선전대를 각지에 파견하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문혁의 첨병으로서 이용당했던 홍위병은 모택동에 의해 결별의
선언을 받게 되었다. 모택동은 학생들이 농촌에 가서 ‘빈농과
중농으로부터 재교육’을 받으라고 명령했다. 대학, 고등전문학교의 졸업생들로 하여금 농촌과 공장으로 하방(下放, 당 간부, 지식인, 학생 등이 농촌과 공장 등에 가서 실제로 노동에 참여하는 일)을
하게 한 것이다. 연말에는 중등 교육을 받은 도시학생들인 ‘지식
청년’이 농촌에 정주하는 ‘상산하향(上山下鄕)운동’도 전국 규모로 시작되었다. 홍위병은 이리하여 정치에서 그 모습이
점차 사라져 갔다.
3. 문화대혁명의 결과
i.
사회적
대혼란과 대손실 초래
문화대혁명은 중국인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많은 경제활동이 “혁명이
우선”이라는 논리 하에 중단되었다. 문화대혁명이 결과적으로
일으킨 사회적 대혼란과 대손실을 살펴보자.
천안문 광장의 ‘백만인
집회’에서 모택동의 접견을 받은 대학생이나 중학생 등 ‘홍위병’은 군복 차림으로 북경 시내를
행진했고, 다음날인 1966년 8월 19일, 북경시 제2중학교의 홍위병에 의해 북경 곳곳에 “구세계에 선전 포고한다”라는 대자보가 나붙었다. “우리들은 낡은 세계의 비판자이다”라는 이 대자보는 전날 집회에서 당 부주석 및 임표가 제안한 “모든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을 때려 부수자”라고 하는 ‘4구(4舊) 타파’를 소리 높여 외친 것이었다.
그 날, 북경의 오리 요리로 유명한 음식점 ‘전취덕’을 북경 제2, 제25, 제63중학교의 홍위병들이 점거해 버렸다. 그들은 ‘자본가가 노동 인민의 피와 땀을 착취한 상징’이라는 이유를 들어 70여년의 역사를 가진 팻말을 끌어내리고, 가게 안의 산수화를 찢어버렸다. 홍위병들은 ‘모택동 사상 산전원’과
‘치안원’을 그들 중에서 선전하여 종업원에게 모택동의 초상화나
어록을 가게 안에 잔뜩 붙이게 했다. 홍위병은 이렇듯 ‘구세계’의 이미지를 일신한다고 하며 점포뿐만 아니라, 시설이나 길가의 팻말에도
종이를 발라서 명칭을 차례차례로 바꾸어 나갔다. 예를 들면, 동안
시장을 모택동이 말한 “동풍(공산주의)은 서풍(자본주의)를 제압한다”는 의미의 ‘동풍 시장’으로, 천안문 앞의 장안가는 모택동 찬가의 곡명을 따라 ‘동방홍 대로’로, 소련 대사관 앞의 양위로는 ‘반수로(反修路)’로 개명하는 식이었다. 심지어 사천성의 마파 두부의 발상지인 ‘진마파 두부 반점’이라는 가게는 ‘진마파’ 세
글자가 팻말에서 삭제되었다. 봉건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 상표인 ‘마파
두부’는 구사회를 상징한다는 이유로 ‘마랄 두부’로 변했고, 점포명은 문혁 승리를 기념한다 하여 ‘문승 반점’으로 개명되었다.
이렇듯 홍위병의 ‘4구 타파’와 ‘4신 확립’은 봉건
사회에서 내려온 낡은 폐습을 없애고 혁명화한다는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외국에도 알려져 그 참상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전까지는 사르트르와 지식인들의 찬송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확실히 구식적이고 경직된 사고 방식으로
초래된 것으로, 전 사회의 혼란을 야기했다. 어떤 홍위병은
“빨간색은 혁명의 상징인데도 빨간색 신호로 정지하는 것은 이상하다”라고
우겨 대어, 정지 신호와 진행 신호를 바꾸어 교통 사고를 빈발시켰다.(<문화
대혁명 10년사>) 예술가들은 반혁명 분자로 낙인찍혀
구타당했으며. 연극의 대도구와 소도구는 불태워졌다. 국무원
공안부와 인민 해방군 총참모부는 “혁명 학생 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해서는 안 된다”라는 통첩을 내려 이러한 파괴 행위를 묵인하고 있었다.
이러한 묵인은 홍위병들의
혼란스러운 질주로 이어졌다. ‘4구 타파’는 더 나아가 ‘4류 분자’나 ‘흑5류’등을 공격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4류 분자’는 지주, 부농, 반혁명 분자, 악질분자를 가리키고,
‘흑5류’는 이에 우파 분자인 최고 악질 분자를
의미한다. 1966년 8월
27일, 북경 남부의 대흥현에서 집단학살사건이 일어났다.
8월 27일부터 9월 1일에 걸쳐 대흥현 각지에서 총 22세대, 80세대 노인에서 생후 38일 되는 젖먹이까지 325명이 희생당했던 것이다. 문혁 후 공식 집계에 따르면, 같은 시기 북경에서만 1529명이 학살당했다. 실각한 당이나 군부의 간부들이 죄상을 적은 삼각 모자를 쓰고 거리로 끌려 다니며 온갖 욕설과 고문을 받으며
죽어갔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강청 등을 향한 홍위병들의 반기도 펄럭이고 있었다. 모택동을 찬양하며
당내 서열 2위로 뛰어오른 임표는, “당내에는 유소기와 등소평처럼
대중을 압박하는 반혁명 노선과, 대중에게 의거하여 대중을 움직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노선이라는 두 가지
노선이 대립하고 있다”고 말하고, “전국은 한 때 ‘유, 등 노선’이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했었다”고 말했다. 당에 대한 신뢰는 크게 흔들렸고, 북경 농업대학 부속 중학교 학생 2명이 임표에 대한 비판을 제시했다. “임표는 모택동을 지나치게 치켜세우고, 문혁의 문제를 이해하고 있지
못한다”는 비난이 그 요지였다. 이 움직임에 호응하여 북경의
고참 홍위병들이 ‘수도 홍위병 연합 행동 위원회(연동)’을 결성하고 중앙 문혁 소조에 대한 비판을 개시했다. 그들은 대부분
당이나 인민 해방군 간부의 자제가 많았기 때문에, 부모나 가족이 중앙 문혁 소조와 신참 홍위병들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반혁명’이라고 비난하고 공격하는 홍위병끼리의 무력 항쟁이 빈발했다. 그 과정에서 당 지도부의 선동에 이용당하기만 하던 홍위병 운동에서 주체적으로 독자적인 문화 혁명을 전개해 나가자는
주장이 나왔다. “중앙 문혁 소조를 내몰아 버리고, 우리들이
혁명을 일으키자”라는 대자보는 그 효시였다. 파문은 커져, 청화 대학, 북경 대학, 북경
항공 학원 등의 홍위병은 공격 대상을 문혁 소조, 임표, 강청에게
돌렸다. 그들은 6번이나 공안 당국을 습격했고, 이에 대항해 ‘중앙 문혁 소조’는
치안 부대를 출동시켜 반대파 홍위병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또한 문혁 소조는 당, 정부, 군 지도부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시작했다. 북경 시장 팽진, 전 인민 해방군 총참모장 나서경 등은 그 피해자였다.
소수민족 문화의 핍박도 있었다. 티벳에서는 티벳인 홍위병도 참여하여 6천여개의 사찰이 파괴되었고, 내몽골에서는 수십 년 전 해체된 ‘내몽골 인민당’의 분리주의자로 지목된 79만명의 인물들이 박해받았다. 그 중 학살로 22,900명이 사망하고, 12,000명은 장애를 갖게 되었다. 이 외에도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는
위구르인들이 소중이 여기는 코란이 불살라지고,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는 조선어로 수업하는 민족학교이
파괴되었으며, 관련 인사들이 핍박을 받았다. 이렇듯 문화대혁명은
중국 사회 전체에 대혼란과 대손실을 야기한 운동이었다.
ii.
임표의
부상(浮上)과 몰락
여산 회의에서 대약진 운동의 참상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모택동을 일관되게 ‘”모택동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며 계속 칭찬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국방부장이었던 임표였다.
2천만 명 가까운 아사자를 내고, 모택동이 ‘지도
책임’을 인정한 1962년
1월의 중앙 공작 확대 회의(7천인 회의)에서도, 이러한 어려움이 생겨난 것은 “모 주석의 의견이 존중되지 않았거나
큰 방해를 당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 사람도 임표였다. 임표는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그의 신조대로 ‘대가는 가장 적고, 수확은 가장 많고, 시간은 가장 빠르게’ 지배권을 확립하려면 당 주석인 모택동의 권위를 빌리는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모택동 신격화를 지속해 나갔다. 그는 간단 명료한 말로 본질을 파악하고, 사람을 고무하고 움직이게 하는 재능이 있었다. 모택동은 그런 그에게
화답을 보냈고, 임표는 <해방군보>에 모 주석의 어록을 게재하라고 명했다. 이러한 임표의 행동은
수정주의의 부활을 두려워하는 모택동의 전 국민의 ‘계급 투쟁’ 호소와
잘 맞물리는 것이었다. 임표는 군에서 모택동 사상 교화 운동을 전개했고, 1964년부터 모택동은 ‘해방군에게 배워라’운동을 전국에서 전개하였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그는 강청을 비롯한 ‘중앙 문혁 소조’와 긴밀히 연계해 모택동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지속적으로 모택동 찬양을 해 나갔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 계속되는 조반파의 무력 투쟁이 심화되면서 전국적으로 혼란이 일어나자, 모택동은
개인 숭배를 중지하고 홍위병들을 ‘하방 운동’과 ‘상산하향’운동에 참여하여 정치에서 멀어지게 했다. 이러한 모택동의 변화는 임표의 권력 유지에 큰 위협이 되었다.
1969년 3월 2일, 중국과 소련의 국경을 흐르는 오소리 강에 있는 진보도에서 중국군과 소련군 양군이 무력 충돌했다. 본래 국경선 분쟁이 있었던 곳으로, 흐루시초프가 실각하고 브레즈네프가
소련 공산당 제1 서기로 취임하면서 그 빈도가 갑자기 증가하며 첫 무력 충돌이 난 것이다. 모택동은 이를 활용해 임표에 의해 배제되어 온 군 원로들에게 활동할 자리를 마련하고자 했다. 임표의 군대는 당 내의 실권 장악을 지향하고 있었지만, 경제를 다시
일으키려 하는 주은래 등 실무파에 있어 급진파의 대두는 바람직하지 않았다. 이는 모택동도 인정하고 있었다. 모택동은 또한 등소평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어 유소기와 같은 영구 제명 처분은 받지 않도록 했다. 이는 임표와 강청이 줄기차게 주도해 오던 ‘유소기, 등소평 제명’과는 맥락을 달리 하는 것이었다. 임표는 군 원로와 등소평이 복권되면 자신의 자리가 위협해질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그의 위기의식은 심화되고
있었다.
임표 측에는 다행이게도, 얼마 후 중국 공산당 제9회 전국 대표 대회에서 임표는 모택동의
‘후계자’로 공인되었다. “임표
동지는 일관하여 모택동 사상의 위대한 홍기를 높이 내걸고, 가장 큰 충성심을 품고, 가장 확고하게 모택동 동지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노선을 집행하며 지켜 왔다. 임표
동지는 모택동 동지의 친밀한 전우이며 후계자다.”라고 규정한 규약 개정안이 만장 일치로 채택된 것이다. 임표는 실질적 권한을 갖고 싶어했다. 그것은 ‘국가 주석’이었다. 모택동이 10년 전에 대약진운동의 책임을 지고 유소기에게 넘겨준 국가 주석직에 다시 취임할 리 없다고 본 것이다. 국가 주석직에 오를 사람은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택동은
1970년 3월, “국가
주석은 두지 않는다”며 조문을 삭제하도록 공언했다. 임표파는 1970년 8월 모택동 ‘천재’론을 들고 나왔다. 헌법 서문에 모택동을 ‘천재’라고 명기하도록 강경하게 주장한 것이다. 국가 주석에 접근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모택동의 비서였던
당 정치국 상무위원 진백달에게 이 작업을 맡겼다. 그러나 모택동은
<나의 약간의 의견>에서 “진백달이라는
천재 이론가가 많은 동지를 기만했다”고 이름을 들어 비판했다. 이름을
말하진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임표를 비판한 것이다. 그 후
닉슨의 중국 방문 준비 과정에서도 대미 강경파인 임표의 영향력은 지도부에서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임표의 지지자들은
모택동을 축출하기 위해 임표의 손에 남아있는 군권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임표의 아들으로 공군의 고위
지휘관으로 초고속 승진했던 임입과가 중심이 되어 모택동을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571공정”(무장봉기를 뜻하는 단어와 그 발음이 같다)으로 이름 붙여진 이 계획은 1972년 1월 13일자 <당 중앙 4호 문건(극비)>로 그 실체가 알려졌다. “그는 이미 현대의 진시황제가 되어
버렸다. 그는 진정한 마르크스 레닌주의자가 아니라, 공맹의
도를 행하고,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옷을 빌어 진시황제의 법을 집행하는 중국 역사상 최대의 봉건적 폭군이다.” 등의 문구 등이 24페이지의 노트에 쓰여져 있었다. <571공정>은 9개
항목으로 나뉘어 쿠테타의 필요성과 시기 등을 논하고 있다. 이 문건에 따르면, 임입과는 장춘교를 임표를 대신할 모택동의 후계자로 경계하고 있었다. 그는
모택동에 의한 권력의 ‘평화적 이행’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불확실하며, B-52(모택동을 부르던 임입과의 암호명)의
한 마디로 권력을 ‘누군가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제 3의 가능성인 ‘앞질러
빼앗는다’에 중점을 두었다. 이를 이루는 방법은 장춘교 세력을
축출하여 ‘평화적 이행’을 이루는 방법과, 모택동을 없애는 두 가지 방안이 있었다. 임입과는 후자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1971년 8월 15일 즈음, 모택동이 남방 순시에서 각 성의 당, 정부, 군의 책임자들을 불러모아 임표의 측근 장군들이 당을 분열시키려 한 점을 추궁했다. 모택동이 공공연히 ‘후계자’ 임표의
책임을 묻고 총괄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모택동의 강화 내용은 임표와 그의 아내 섭군에게 전달되었고, 아들 임입과는 ‘앞질러 빼앗는다’를
실행해야 한다고 보고 모택동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후에 ‘임표
반당 반혁명 집단’ 사건의 기소작에 의하면, 임표와 섭군, 임입과 등이 1971년 9월 8일 “무장 쿠테타를 일으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단정짓고 있다.
임입과는 남방
순시중인 모택동을 암살하고, 동시에 북부에서는 임표와 대립하게 된 강청이 거점으로 삼고 있는 정부 영빈관인
조어대를 습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모택동의 전용 열차를 폭파시키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만일 전용 열차가 상하이 홍챠오 공항의 간선에 갈라져 들어가는 선로에 정차하면, 근처의 석유 탱크를 폭파시켜 모택동 일행을 처치하는 것이다. 또는
‘일본인이 장작림에게 한 방법’으로, ‘제 2의 황고둔 사건(장작림
폭살 사건)’을 위해 철교를 폭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법은 모택동이 공항용 석유 탱크의 삼엄한 경비를 하게 하고, 예상 외의 루트로 북경에 도착하여
모두 실패하였다. ‘모택동 암살 계획’은 이렇게 불발되었다.
계획이 모두 실패로
끝난 임표, 임입과, 그리고 섭군에게 남은 것은 탈출밖에
없었다. 세 사람은 대련으로 거주지를 옮긴다고 거짓말을 한 뒤, 공군의
트라이던트 ‘256호기’를 이용해 광주로 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수상한 낌새를 알아챈 주은래와 임표의 다른 아들 임입형의 밀고로 그들은 총격을 피하며 겨우 탈출에 성공한다. 1971년 9월 13일
오전 0시 32분, 임표
일당이 탄 ‘256호기’는 하북성 북대하의 산해관 공항에서
이륙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256호기는 산해관 공항에서 서쪽을 향해 날아가다가 내몽골 자치구 상공에서
갑자기 진로를 북쪽으로 돌렸다. 주은래는 256호기가 몽골
영공으로 들어가 소식이 끊긴 뒤, 임표가 소련으로 도망쳤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256호기는 몽골 운도르한에 추락하여 불타버렸다. 이는 후에 중국과
몽골의 조사 결과, 연료가 떨어져 불시착하려다가 실패하여 추락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렇게 모택동의 ‘후계자’까지
지명되던 임표는 추락사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iii.
천안문 사건(1976년)
임표가 추락사로 생을 마감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국무원 총리 주은래는 온건 실무파로서
‘좌로 기울어짐’을 저지하려고 했다. 국가 경제 계획을 재검토하고, 기초 과학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과
연구를 부활시키는 일을 점차 진행해 나갔다. 1973년 3월 10일, 등소평이 복권된 것도 그 흐름을 따른 것이었다. 그는 5개월 후, 8월에
열리는 당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으로 다시 뽑혀, 국민 경제 재건에 착수한다.
하지만 강청 등 급진 혁명파는 ‘우로부터의 반격’을
봉쇄하려 했다. 모택동은 임표 사건의 충격을 잠재우기 위해 ‘비림정풍(임표를 비판하고 사상을 조정하는) 운동’을 전개했는데, 주은래는 여기서 임표 사건을 일으킨 것은 극좌 사상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극좌 비판을 전개했다. 그러나 장춘교와 강청은 이를 비판했다. 임표는 ‘극우’라는 것이다. 결국 문화 대혁명 자체가 부정당할까 두려웠던 모택동도 이에 찬성하게 되고, 주은래의
발언권은 상실되고 만다.
1973년 말, 강청이 주도한 ‘비림비공(임표를 비판하고 공자를 비판한다는)운동’이 전개되면서, 주은래는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 강청이 동원한 1974년 춘절 휴일 ‘비림비공’ 동원 대회에서 급진 혁명파가 “보수 세력을 대표하는 반동적 공자 사상을 가진 사람은 권력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한다”며 노골적으로 주은래를 비판한 것이었다. 강청은 요문원, 왕홍문, 장춘교와 함께 ‘4인방’을 형성해 미디어를 장악하고, 모택동이 ‘반동’으로 간주하는 공자에 빗대어 주은래를 공격해 왔다. 그들은 ‘비림 비공 비주공’ 등, 공자가 이상적인 인물로 생각했던 ‘주공(주나라 재상)’에 빗대어 주은래를 드러내고 비판하는 벽보를 싣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문혁에 진저리를 친 많은 사람들의 불만과 반발을 일으켰다. 그래서 중병을 안고 공격을 꾹 참아가며 헌신적으로 공무를 수행하는 주은래 쪽으로 사람들의 동정은 모였다. 당 내에 파벌이 형성되는 것을 꺼려했던 모택동도 강청을 문책할 수 밖에 없었다.
주은래는 자신의 염원이었던 ‘중국의 근대화’를
빠르게 진행시켜 나갈 수 있는 등소평을 지지했다. 등소평은 각 지도부에서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모택동은 이를 지시함으로써 ‘안정과 단결’을 지지했다. 그러나 4인방은
등소평에 대한 공격을 더욱 심화했고, ‘타도 등소평’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등소평은 결정적으로 모택동에 지시로 연 회의에서 “문화
대혁명의 평가를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애매모호한 말을 해
4인방의 공격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모택동은 이를 비평했고, 강청 등 4인방은 전국의 직장과 학교에 대자보를 붙이고 간부들을
비판 투쟁에 끌고 나오게 해 등소평 세력의 정치적 생명을 끊었다. 결국, 모택동은 외교 분야만 제외하고 등소평을 국가 행정의 일상 업무에서 해임하는 결정을 내렸다.
주은래는 방광암으로 1976년 1월 8일 사망했다. 그러나 강청은 병원에서 열린 고별식에서 예의에 어긋나게도
모자를 쓴 채 묵념을 하고 있었고, 이것이 중앙TV 뉴스에
방영되었다. 4인방의 영향권 안에 있는 <인민일보> 등에서는 주은래의 공적을 찬양하는 보도를 억제했고, 주은래를
비판하는 ‘우로부터의 반격에 재반격을 가하는 운동’에 관한
논문을 실었다.
대중은 이러한 현실에 불만이 쌓였다. 문혁으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난 1978년, 민중들은 급진 노선에
대한 불만이 심각하게 쌓여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4인방은
공식 추모 행사가 끝나는 1월 이후부터 다시 주은래에 대한 비판을 신문에 싣기 시작했다. 이를 본 민중들은 더욱 분노해서 1976년 3월 28일과 29일 남경에서
“주 총리를 반대하는 당나귀 대가리, 장춘교를 처부숴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항거했다. 북경에서도 “장춘교, 강청, 요문원은
수많은 늙은 동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나서 당을 빼앗아 차지하고 권력을 탈취하려 하고 있다”란 선전
전단이 나오기 시작했다. 14절기의 하나이자 조상의 무덤을 참배하고 혁명 열사를 기리는 4월 4일 ‘청명절’을 앞두고 주은래 추도와 일체가 된 4인방에 대한 항의 행동은 전국
각지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북경 인민 영웅 기념비에는 주은래를 추도하고 4인방을 비판하는 뜻에서 꽃다발이 바쳐졌다. 거대한 화관, 슬로건, 꽃다발, 꽃주머니
등으로 천안문 광장은 가득 채워졌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북경시 공안국은 당 부주석 왕홍문의 지시를
받아 화환 등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26명이 체포되었으나, 이는
그저 유혈 사태의 서막일 뿐이었다.
1976년 청명절인 4월 4일 일요일,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는 ‘4인방’을 규탄하는 대중이 전국 각지에서 약 2백만 명쯤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는 4인방의 주도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밤 9시 반, 광장의 조명이 일제히 꺼지고, 다시 모든 전등이 켜지면서 민명 1만명과 공안 경찰 3천명, 인민 해방군 북경 위수구 부대가 곤봉과 혁대를 손에 쥐고
군중을 진압했다. 광장은 선혈이 낭자했고, 북경에서 388명과 전국 각지에서 천여 명 가까이 체포되었다. 이것이 바로 1976년 ‘천안문 사태’였다.
강청을 포함한 4인방은 이를 “소수의 우파
반혁명 분자의 책동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며, 등소평을 규탄했다. 강청은 특히 모택동에게 “천안문 광장의 사람들은 모 주석을 집중
공격한 반혁명 폭도였다.”라는 왜곡된 보고서를 보여주어 모택동이 이를 ‘반혁명 동란’으로 규정하고 등소평의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는 데 동의하도록
만들었다. 등소평의 세 번째 실각이었다.
iv.
모택동의 죽음과 4인방의 몰락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은 사망했다. 4인방은 모택동이 화국봉에게 직접 써 주었던
세 문장 중의 하나인 “과거의 방침에 비추어서 하라”를 입맛대로
해석했다. 그들은 문화 대혁명을 이어나가는 것은 “기정 방침”이며, 모택동의 지령을 계승하는 것은 자신들이라고 주장하는 ‘문공(문필에 의한 공격)’을
시작했다. 4인방은 국영 통신사인 신화사나 다른 지방 신문사에 모두 연락하여 “기정 방침”이 임종 전 모택동이 남긴 유언이라고 강조하도록 했다. 강청은 또 모택동이 생전 남긴 문서를 장악하여 권력의 기반으로 삼으려고 했다.
모택동의 문서류는 당시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으로서, 강청이라 할지라도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강청은 모택동 사후 주석 자리에 오른 화국봉에게 전화를 걸어 긴급 회의를 소집하게 했다. 그 자리에서 강청은 자신이 주석의 미망인이므로 당연히 남편의 문서나 초고를 정리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했다. 강청은 화국봉에 대한 압력을 높여나갔다.
4인방은
인민 해방군 내에 기반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국에 ‘민병’을 조직하고,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특히 상해의 민병은 그 세력이 강력했다. 4인방은 이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강력한 군 지도자인 섭검영과 인민해방군의 지지,
그리고 조금씩 활동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었던 등소평의 지지 아래에서 화국봉은 4인방의 체포를
명령한다. 결국, 10월
10일 8341 특수연대는 4인방 전원을 체포하게
된다. 강청 등의 ‘반혁명 집단 사건’은 체포한 지 4년 후인 1980년 11월 2일 기소되어, 1981년 1월 25일 판결이 내려졌다. 강청과
장춘교는 사형(2년 후, 무기 징역으로 감형), 왕홍문은 무기 징역에 ‘정치 권리’ 종신 박탈, 요문원은 징역 20년과
정치 권리 박탈 5년을 선고받았다. 이렇게 하여 문화대혁명은
그 끝을 맞이하게 된다.
참고문헌
『모택동 비록』 상, 하 - 산케이신문, 문학사상사 옮김(2001)
『아틀라스 중국사』 - 박한제
등, 사계절(2007)
『중국의 붉은 별(상.하)』 - 에드가 스노우, 홍수원 옮김, 두레(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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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다음 디제로
답글삭제대약진 운동 공부하다가 구글에 검색하니까 가장 먼저 나오네! 블로그 운영도 열심히 하고 있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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